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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 중국의 조선 민족 정책과 조선족 사회현황(박금해,2005)
조회 1665
첨부파일
회원이미지권정혜
2012-05-19 13:13:30
       
좀 오래된 자료이나 좋은 자료입니다.
조선족 이해를 위한 필독입니다.
특히 처음 가시는 분들은 꼭 읽고 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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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민족정책과 조선족사회현황
 
중국 연변대학민족연구원 교수박 금 해
 
 
Ⅰ. 들어가는 말
 
접 목(이삼월)
 
접목의 아픔을 접고/ 먼 이웃 남의 뿌리에서/모지름을 쓰면서 자랐다//
이 곳 토질에 맞게/이 곳 비에 맞춤 하게/이 곳 바람에 어울리게//
잎을 돋치고 꽃을 피우고//
이제는 접목한 자리에/ 튼튼한 테를 둘렀거니//
큰바람도 무섭지 않고/ 한마당 나무들과 정이 들고/ 열매도 한 아름 안고...//
그러나 허리를 잘려/ 옮겨오던 그날의 칼소리//
가끔 메아리로 울려오면/ 기억은 아직도 아프다//
 
조선족공동체의 형성을 시적으로 옮긴 의미 깊은 시구이다. 어언 한 세기 반의 역사, 비록 몽고족과 같이 유라시아 대륙을 주름잡던 화려한 역사가 아닐지라도, 비록 만주족과 같이 광활한 중국대지를 한 손에 움켜잡던 장려한 화폭이 아닐지라도, 우리들의 역사에는 고국을 떠나 이국 땅에서 나라 잃은 설음을 딛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억척스레 일구던 우리 조상들의 거친 숨결이 어려 있으며 빼앗긴 조국을 찾고자 만주땅 곳곳에 이슬로 산화된 우리조상들이 피가 배여 있으며 또한 접목의 아픔을 참고 중국이라는 터전에서 새로운 조선족공동체로 재창출되기까지의 방황과 선택, 시련과 성공이 얽혀 있다. 비록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비록 거창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삶의 발자취이다. 오늘날 산업화와 세계화의 세찬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후대들에 의하여 점점 희미하여져 가는 우리 조상들의 눈물겨운 발자취, 그것을 어찌 단지 망각이라고만 하랴...
이 글에서는 접목의 아픔을 참고 이국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튼튼한 테”를 두르기까지의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 그리고 이러한 “우리”가 있기까지의 중국의 민족정책을 단편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중국 조선족공동체 형성에 대한 史的 고찰
 
1. 조선족의 이주
 
중국과 조선은 강을 사이 둔 隣國으로서 예로부터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히 국경일대의 두 나라 백성들은 서로 국경을 넘나들며 채삼, 수렵, 무역활동에 종사하였다. 明末淸初로부터 여러 가지 원인으로 중국에 건너 온 조선인들의 일부는 점차 중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로 조선북부백성들의 범월잠입이 면면히 이어지다가 19세기 중엽 조선반도에 들이닥친 자연재해로 반도북부의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중국경내로 대거 이주하면서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주초기의 주민은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 등 조선반도 북부일대의 주민들로서 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그 인근지역에 마을을 구성하여 양강유역에 조선족촌락들이 零星하게 분포를 이루기 시작하여 점차 지금의 연변일대와 남만주일대를 중심으로 조선족집거구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장백산일대를 龍興之地로 간주하고 300여 년간 봉금정책을 취해오던 청나라도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동북변강을 개발하고 러시아로부터 오는 동북변경우환을 없애기 위하여 봉금을 해제하기에 이르렀고 변강개발에 조선인의 힘을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한때는 두만강이북 해란강 이남의 약 700여리의 지역을 한민 개간지로 제정하는 등 우혜조건으로 조선인의 이주를 환영하기도 하였다.
20세기초엽, 을사보호조약의 체결, 조선군대의 강제해산, 한일합병 등 일제의 본격적인 조선침략으로 조선의 국운이 날로 기울어져 가는 형세 하에서 민족의 자유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해외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자 수많은 조선의 애국지사들이 중국의 동북일대와 러시아 연해주일대에 망명하였다. 일제의 경제적인 착취와 정치적 압박에 못 이겨 많은 백성들도 동북으로 이주하였다. 1920년에 이르러 이주민 수는 45만 9.400여명에 이르렀으며 1930년에는 63만을 넘었다.
“9․18”사변 후 일제는 동북의 개발에 조선반도의 인력을 활용하고자 백만 이주계획을 제정하고 강제적으로 조선인을 이주시켜 집단부락, 안전농장 등 형식의 촌락을 구성함으로써 이주민의 수가 대폭 증가하였으며 따라서 이주민들의 출신지역도 함경도와 평안도를 벗어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부일대까지 포함한 전 지역으로 넓혀지게 되었다. 당시 인구가 희소한 흑룡강성북부는 일본이 강제이민을 실시한 주요 지역의 하나로, 1940년 한번에 눈강, 용진 등지에 이주해간 조선인만도 2,810호에 달하였다. 일제의 강제이민으로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날로 늘어났는바 1945년에는 216만 3천여명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중국의 조선족, 그들은 19세기 후반기로부터 기황을 피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피해, 독립운동을 위하여, 또는 일제의 강제이주에 의해 중국의 동북에 이주하였던 조선인들의 후예들이다.
 
2. 조선인들의 정착과 중국역사에 대한 공헌
 
(1) 수전의 개발
 
이주민들의 공헌은 단연 변강의 개발과 수전 개발을 꼽을 수 있다. 300여 년간 봉금정책에 의하여 황폐화된 동북의 변경일대에 정착한 선민들은 열악한 자연조건을 극복하면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진 펄을 갈아 번지면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수전농사에 뛰어난 이주민들은 동북의 한랭한 기후조건과 자연조건을 극복하면서 동북 땅에 처음으로 수전 농사를 보급하여 동북변강의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근대농업사상 처음으로 동북에 논농사를 성공시킨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동북일대에서의 근대 논농사는 제일 먼저 1875년 압록강이북지구 통화일대에서 시작되어 점차 유하, 흥경, 안동, 봉천, 신민 등 지방에 파급되었으며 남만일대의 조선족거주지역은 점차 동북에서의 주요한 벼 생산기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두만강 북안에서도 수전이 개발되었으며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북만의 동녕, 목릉, 녕안, 해림 등 지역에서도 무상기가 짧은 당지의 한랭한 기후조건을 극복하고 벼재배에 성공하였다.
1920년의 통계에 따르면 연변, 길림지구 수전의 100%, 통화, 봉천지구 수전의 85%, 안동지구 수전의 70%, 개원지구 수전의 90%, 무순지구 수전의 80%는 모두 조선인들이 개간하고 다루었다. 벼재배의 성공은 근대 동북의 농업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는바, 수전의 개발로 동북의 경작지면적이 크게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단일한 한전농사에서 벗어나 수전을 함께 경작함으로써 역대로 입쌀을 수입하던 동북은 20세기 10년대 말부터 입쌀을 수출하게 되었다.
 
(2) 반일독립운동과 중국항일전쟁에로의 적극적인 투입
동북에 해외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하려는 취지에서 조선의 쟁쟁한 민족지사들이 대거 동북에 이주하면서 동북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주와 더불어 민족독립의 취지에서 각지에 반일단체들과 사회단체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민중의 계몽운동과 자치운동 및 독립운동의 준비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장기적인 온양과 준비를 거쳐 1919년 3월 13일, 조선족의 중심지인 용정에서 대규모의 반일집회와 시위가 있었으며 또한 이 운동을 계기로 조선족들의 반일운동은 직접적인 무장단체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19년과 1920년 사이, 국민회,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 반일단체들이 동북각지에 설립되었으며 이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제는 반일단체들을 압살하려는 목적에서 1920년, 즉 경신년에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대 토벌을 감행하였다. 반일단체들은 홍범도, 김좌진 등의 지휘하에 교묘하게 합동적전을 진행하여 유명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이룩함으로써 한민족의 저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20년대에 진입하여 민족주의 반일단체들은 상호간의 이념, 투쟁방략 등 차이로 여러 차례의 통합과 분열을 거쳐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 등 단체로 가닥을 잡기 시작하였다.
“9.18”사변 후, 조선인반일운동역량들은 과거의 고군분전의 한계를 극복하여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과 제휴하여 중국의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동북일대에서의 조선인촌락들은 과거부터 반일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왔기에 중국동북지역의 항일운동의 시작에서 조선인마을은 자연히 중국항일유격전쟁의 근거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특히 연변일대의 중공유격대와 유격근거지는 거의 조선인과 조선인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뒤의 유명한 동북항일련군 각 군에도 우수한 조선인 관병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오늘날 연변 각지에 세워져 있는 항일열사 戰績碑들은 어려운 삶 속에서도 독립군에게, 유격대에게, 항일연군에게 물적으로, 인력 적으로 최대의 성원을 보내주었던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의 가장 좋은 기록이자 징표이기도 하다.
광복 후, 일부의 독립지사들과 백성들은 고향을 찾아 반도에 돌아가고 자의에 따라 동북에 그대로 남은 조선족들은 중공정부로부터 토지를 분여받게 되었으며 중국의 해방전쟁에 적극 투입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 중국의 민족구역자치정책에 의하여 1952년 연변에 조선족자치구가 성립되었으며 1958년에는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성립되었다.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 56개 민족의 일원으로, 중국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충분히 향유하게 되었으며 중국 56개 민족 중 수적으로 11번째의 민족으로, 그 역사가 여느 민족에 비하여 짧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에서 문화와 교육이 발달한 우수한 민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3. 조선족공동체의 응집력
 
조선족의 천입 과정으로부터 볼 수 있는바, 중국의 조선족은 특수한 역사환경과 조건에서 이주민과 그 후예들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중국경내의 새로운 민족공동체이다. 이국 땅에서, 그것도 수시로 갈마드는 중국당국의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이 중국 땅에 정착할 수 있었고 또한 오늘날까지 중국의 당당한 소수민족일원으로 끈끈한 민족의식을 유대로 민족공동체를 존속, 유지할 수 있었던 힘과 기반은 무엇일까?
 
(1) 자급자족의 경제공동체
 
초기이주민의 대다수는 적빈의 상태에 처한 농인들이었다 .생존의 길을 찾아 황막한 만주 땅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근면과 노력으로 변강을 개발하였으며 특히 무상기가 짧고 수전 경험이 전혀 없는 만주 땅에서 수전 재배에 성공하였다. 변강개발, 특히는 수전 농사의 성공은 이주민들의 정착을 가능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전 농사에 필요한 수맥, 관개수로 공사, 진펄개간 등은 일정한 규모의 집단노동을 소요하기에 이주민들의 집거지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이루어진 조선족촌락은 조선인들의 상부상조의 공동체의식에 의하여 자연히 한반도내의 동향사람들을 중심으로 지역공동체로 결집되었으며 이 같은 지역공동체는 민족의 동질성보존을 가능케 하였다.
 
(2) 민족교육
 
초기 이주민들의 공동체는 단순한 자급자족의 경제공동체만은 아니었다. 이주초기로부터 零星하게 산재되어 있는 조선족사회를 응집시키는 중요한 도경은 바로 교육을 통한 문화공동체의 형성이다. 마을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서당이나 학교설립을 서두르는 것이 당시 조선족사회의 보편적인 풍경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의 조상들은 생계유지와 함께 후대의 양성에 힘 다하였다. 또한 당시의 조선족사회의 특유의 역사적 배경으로 이런 학교들은 단순한 교육의 장을 넘어 사회공동체의 결집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족공동체의 기본적인 존립을 가능케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주초기 및 이주이후의 상당히 긴 시간동안 학교는 조선족공동체의 매개역할을 하였다. 조선족 각종 민간단체의 건립과 활동, 조선족과 중국당지 지방관청과의 교섭, 조선족공동체내부의 일상사무관장 및 반일운동의 온양과 조직 등 일련의 일들이 모두 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민족지사, 지방유지인사 등 조선족사회의 핵심인물들, 이를테면 김약연, 이동휘, 마진, 계봉우 등은 그들 자신이 교육의 조직자이고 담당자였다. 조선족사회는 2, 3세를 학교에 수송하였으며 학교교육은 민족공동체의 문화소질을 높이고 민족의 응집력을 높이는데 막강한 작용을 하였다.
 
(3) 파란만장한 조선족의 정치운명
 
중국의 조선족사회는 이주하여서부터 한국독립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민족의 계몽운동, 민족교육과 종교활동, 각종 반일단체의 형성, 봉오동, 청산리전투, ‘3부’의 활동, 이 모든 것이 조선족사회를 기반으로 실천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조선족사회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취지 하에 운명을 같이 하는 하나의 정치공동체사명을 짊어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족사회는 반일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으로 되었다. 30년대에 진입하면서부터 조선족사회는 또 중국공산당영도하의 항일기지역할을 감당하였다. 중국공산당의 민족평등정책하에 동북의 조선족은 국민당에 대한 정통의식보다 오히려 중국공산당영도하의 항일연군에 화합하였으며 이러한 조선족들의 공로는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충분히 인정을 받았다. 광복 후 조선족은 중국의 여느 민족과 차별 없이 토지를 분여받았고 당당하게 중국의 공민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밖에 외래민족으로서의 조선인들이 중국이라는 땅에 뿌리내리면서 “튼튼한 테”를 이루기까지에는 중국당국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중공의 민족정책은 조선인들이 종국적으로 중국 땅에 정착할 수 있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점에 한하여서는 아래의 민족정책부분에서 소상하기 다루기에 약한다.
이같이 조선족은 중국에 이주한 후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활동을 매개로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선족공동체의 형성과정에서 우리는 또한 그 허점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조선족공동체의 형성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이 공동체는 어디까지나 성격상 자급자족의 농경생활을 기초로 한 경제문화공동체로, 상당한 봉폐성과 배타성을 띠고 있다. 지나치게 지역공동체와 농경생활에 의존하여 왔기에 경제실력 증장이 부진하였으며 공동체의 유지도 능동적인 추구이기보다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 졌기에 주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생적 적응력이 뒤지게 되었다.
둘째, 조선족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튼실한 구심점이 없으므로 조선족의 응집력에는 한계가 있다. 조선족사회에는 유대인과 같은 종교도 없고 한족과 같은 민족우월주의 의식도 없으며 회족과 같은 강렬한 민족의식도 없다. 그렇다고 민족의 공인을 받는 영수인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천입이래로 조선족사회에는 쟁쟁한 민족지사들이 많이 모여들기도 하였지만 그들 자신이 공화파, 유림파, 의병파 및 공산주의자 등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다보니 조선족사회를 하나로 결속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중공과 제휴한 후 동북의 항일투쟁에서 많은 걸출한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지만 광복과 더불어 조선족사회의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한반도로 귀환하는 바람에 동북의 조선족사회에는 거의 서민층, 빈한층들이 남게 되었다. 신 중국건립 후 새로운 세대의 민족지도인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중국이라는 강력한 정치체제 속에서 자주적인 민족정체성추구보다는 중국국민으로서의 입지구축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조선족의 문화공동체는 한반도와 중국사이에 끼인 봉폐적인 ‘문화의 섬’으로, 중국의 주류문화를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조선족만큼 자기의 문화에 집착해온 민족도 드물지만 이런 집착은 조선족공동체가 처한 지리적, 문화적 위치와 상관없는, 또한 주변 타민족과의 화합을 도외시한 본능적이고 편협 적인 집착이었다. 다른 한 방면, 냉전체제에서 중국이 장기간 한국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북한과도 엄한 일선을 긋고 있었던 탓으로 조선족의 한반도와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도 차단되었으며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도 많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장장 한 세기의 세월을 경과하였음에도 조선족은 중국이나 한국의 그 어느 시각에서 보아도 여전히 변두리 민족이었고 ‘경계민족’ 이었다.
 
Ⅲ. 중국의 민족정책과 조선족
 
1. 역대 중국당국의 대조선인정책
 
중국조선족은 외래민족이라는, 또한 모국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등등의 복잡한 요인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오늘에 이루기까지 비단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거듭되는 고민과 방황 및 모색을 하여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대의 중국당국에서도 이 특수한 집단에 대하여 때론 환영과 부축, 때론 박해와 구축, 때론 동화와 귀화 등등 부동한 정책을 번복하였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늘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찍 청나라 말기 청정부는 여러 가지로 개척민들의 이주를 권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주민들의 치발역복과 귀화입적을 강요하였으며 지어는 토지소유권과 귀화입적을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개척민들의 동화와 입적을 부추겼다. 한일합방 후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로 조선인들이 일제의 중국침략에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게 되자 중국 측은 조선인들의 동화를 재촉하였으며 특히 교육을 통한 2세의 동화를 꾀하였는바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획일간민교육판법”이다. 그러나 중국경내에서의 조선인들의 활발한 반일운동, 중국과 조선의 동병상련의 정치적 운명 및 중국현지에서의 조선인들의 억척스러운 개척의 과정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2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국당국의 동화정책, 혹은 민족기시 정책은 그다지 강력하게 추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국당국은 중국경내에서의 조선인 반일단체들과 그들의 활동에 대하여 동정, 묵인 지어는 암암리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20년대 중반부터 일제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고 또한 이러한 침략과정에 친일조선인단체거나 개인들이 개입하는 까닭에, 또한 동복경내의 조선인 반일단체들의 활동이 수시로 일본군의 동북진출의 빌미로 되어 가는 등 원인으로 조선인은 일제침략의 ‘선두자’, 일제의 ‘주구’로 오인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인식은 급기야 조선인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와 구축으로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봉계군벌정부의 본거지인 요녕성 경내에서의 조선인 구축이 심각하였는바 사회전면에 거쳐 조선인 반일단체, 조선인 학교, 지어는 일반 백성들에 까지 가차없이 박해와 구축을 감행하였다.
“918”사변 후 출범된 위만주국 통치시기 조선족들은 또다시 한차례의 시련을 겪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만주경영, 만주국의 국방, 만주국의 건국이념실천, 더 나아가서는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실현에서 재만조선인을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일제는 “만주국 국민”이면서도 “황국신민“이라는 이른바 “이중국적”을 조선인들에게 강요하였으며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부터는 본격적인 황민화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른바 “准日本人”, “2등국민”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족들은 일제의 만주국통치와 “대동아성전”에 철저하게 이용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 같은 민족이간정책으로 결국 조선족은 만주국내 기타 민족의 시선에는 “일제의 앞잡이”라는 낙인이 깊이 찍히게 되었다.
조선인들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은 중공에 의하여 제정, 실천되었다. 중국은 창당하여서부터 중국내의 소수민족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시종일관하게 민족평등을 중공의 민족정책의 근본이자 기조로 삼았다. 조선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일찍 1928년 “중공 제6차 전국대표대회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안”에서 명확하게 중공의 대조선인문제의 입장원칙을 표명하였는바, “만주의 고려인은 중국경내의 소수민족”이며 “중국경내의 소수민족문제(북부의 몽고, 회족, 만주의 고려인, 복건의 대만인 및 남부의 苗, 黎 등 원시민족, 신강과 서장)는 혁명에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 같은 원칙 입장은 항전승리까지 꾸준히 이어졌으며 중공만주성위를 통하여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에까지 언급되었는바 자치권문제, 토지문제, 민족간부문제, 문화교육과 언어문자문제 등 제 방면을 통하여 중공은 조선족의 평등지위와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하여 주었다.
 
2. 중화인민공화국설립후의 민족정책과 조선족사회의 변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집정경험이 전혀 없는 중공을 놓고 말할진대 하나의 준엄한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수십 개의 복수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의 복잡한 민족관계는 중국의 사회발전과 변강의 안정, 지어는 국토의 완정과 직접적인 연계를 갖고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신민주주의혁명시기 여러 단계의 과정을 통하여 꾸준히 민족문제에 관한 경험을 쌓아온 중공은 중국의 실정에 맞는 민족문제해결의 도경을 찾을 수 있었다.
중국의 민족정책의 가장 근본적인 기조이자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總政策은 바로 민족평등단결정책이다. 중국에서는 민족의 대소와 경제문화발전의 차이 등을 떠나서 중화인민공화국경내의 소수민족의 합법적인 지위와 권리를 인정하였으며 민족정책의 제정에서도 시종 민족평등의 원칙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각 민족의 사회발전정도의 차이에 따라 아직까지 여전히 ‘사실상의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여느 나라에 비하여 중국은 각 민족의 평등권리에 각별한 관심과 주의를 돌렸다는 점에서는 의심할 바 없다.
민족구역자치정책은 중국의 三大政治制度중의 하나이며 중공의 민족정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당면 세계적인 범위에서의 민족문제해결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미 반세기동안의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민족구역자치제도는 중국내 각 민족의 평등, 자치, 자주권을 충분히 인정하였으며 민족지간의 단결을 도모하고 국방을 공고히 하고 소수민족의 경제․문화․사회발전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물론 민족구역자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경내에서, 중공과 중앙인민정부의 통일적인 영도하에, 헌법의 대정방향을 준수하는 전제하의 민족구역자치제도로, 결코 초국가, 초당적인 자치제도가 아님을 강조하여야 한다.
이 같은 중국의 민족정책의 큰 틀을 바탕으로 신 중국건립 후 조선족의 발전은 크게 세 가지 시기를 경과하여 왔다.
 
1) 중국국민으로의 편입(1945~1957)
조선인들은 그들이 처한 특수한 역사적 환경과 일제의 조작으로 말미암아 중국에 이주한 후에도 줄곧 “이중국적”의 멍에를 쓰게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인의 국적문제는 늘 중국당국의 현안으로 떠올랐으며 항일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족의 국적은 사실상 이중국적 혹은 무국적이었다. 때문에 항전의 결속과 더불어 100만에 가까운 재만조선인들의 조선반도에로의 귀환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동북에 재류한 조선인들의 조선과의 내왕에도 별로 큰 제약이 없었다. 일찍 항전이 끝난 후 중공은 사실상 동북의 조선족들의 토지권을 인정하여 주었으며 그들의 정착을 기성 화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북한과의 특수한 사회주의혈맹관계로 중공은 중국의 국공내전에 동원된 몇 만 명의 조선족군대를 북한으로 보내어 인민군사단으로 편제하였으며 한국전쟁과 그 후의 복구사업에도 중국의 조선족을 대거 투입시켰다.
한편 중국내 거주 조선족들에 대한 민족문제에도 관심을 돌렸으며 중국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는 동시에 항전시기부터 표방하던 민족구역자치를 실천에 옮겨 1952년에 연변지역을 조선족자치구(후에 주로 변경 됨)로 규정하였고 1958년에는 장백현을 조선족자치현으로 규정하여 민족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공간적 및 정책적 조건을 제공하여 주었다. 다.
그러나 중국의 이 같은 민족정책에도 불구하고 고국과의 끊을래 끊을 수 없는 민족적, 문화적 유대관계로 조선족과 북한사이에는 줄곧 밀접한 관계가 이어졌으며 따라서 조선족의 조국관도 이중 또는 다중 조국관으로 표출되었는바, 당시의 유행어로는 ‘소련은 계급의 조국, 조선은 민족의 조국, 중국은 현실의 조국’이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중소분쟁의 여파, 북한의 8월 종파사건의 영향 및 중국내의 반우파투쟁의 영향으로 과거의 혈맹국이었던 조선은 철두철미하게 하나의 외국으로 규명되었으며 중국내의 조선족은 북한과 구별되는 중국인으로 자신을 규정할 것을 강요받게 되었다. 따라서 조국문제를 둘러싸고 과거의 사회주의 모국(소련) 민족의 조국(조선) 현실의 조국(중국) 등 다조국관이 결국 현실의 조국으로 귀결되고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모국은 자의와 상관없이 모두 포기되었다. 지어는 고국이라는 표현도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2) 민족말살정책
문화대혁명발발 후 중국의 민족정책은 사실상 민족말살주의 일변도로 넘어가게 되었고 일체의 민족적 특색을 나타내는 표현은 거의 사용금지 되었다. 많은 조선족출신의 당정지도자들과 지식분자들이 지방민족주의, 조선특무 등 누명을 쓰고 숙청되거나 下放하였다. 정치적 민족주의는 물론 문화적 민족주의도 제약을 받았다. 민족학교의 구성이나 수업내용, 교과과정 등 제 방면을 통하여 민족주의는 엄격히 규제되었다. 조선족은 이제 한반도와의 모든 관계가 단절된 중화민족으로의 일원으로 정치, 행정, 사회 문화적으로 중국인으로 정착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이런 현상은 십 여 년간 지속되면서 중국의 조선족을 한반도의 한민족과 구별되게 하였다.
 
3) 개혁개방후의 중국의 민족정책과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의 부흥
문화대혁명의 결속과 더불어 중국은 정치, 경제, 문화, 의식형태 등 제 방면에서 변혁의 전환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개혁개방정책에 따른 중국의 경세실력의 급성장은 중국의 국력을 증강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경내의 각 민족의 중국에 향한 응집력을 제고시키는 밑거름으로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경제실력의 성장에 따라 각 소수민족의 민족의식도 전례 없이 고양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냉전체제의 와해와 제3의 민족주의 물결의 기류 속에서 국외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사조도 예외 없이 중국의 민족문제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중국내의 민족단결과 변강의 안정을 위협하였다. “民族, 宗敎無小事”라는 말에서 민족문제의 중요성과 민감성을 엿볼 수 있다.
새로운 개혁개방시기에 적응하는 민족정책의 제정과 수정이 불가피한 중국은 우선 중국실정에 맞는 민족문제해결의 도경으로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진일보 총화, 완벽히 하여 1984년에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법”을 반포하여 민족구역자치의 실시에 법률적인 의거와 담보를 제공하여 주었다.
다음 소수민족과 민족지구의 경제, 문화발전을 부축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와 특례를 제정하였다. 이를테면 興邊富民, 서부대개발정책 등등의 출범이다.
또한 복잡한 국제환경의 영향을 감안하여 이론적으로도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의 중화일원으로서의 입지를 각인 하는 노력도 엿보기 시작하였는바 이 시기 민족이론에서의 비교적 돌출한 주장이라면 바로 중화민족다원일체의 이론의 출범이다. 중화민족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일체성에 역점을 둔 이론이었다.
이 시기 경제적인 성장과 한국, 조선과의 밀접한 내왕을 바탕으로 조선족의 민족의식도 전례 없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으며 과거의 봉폐된 중국사회 내에서의 잔잔한 호수와 다름없던 조선족사회도 일대 변혁이 일기 시작하였다.
역래로 조선족문제는 중국의 여타지역의 민족문제에 비하여 그다지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 동북에로의 이주과정 및 개척과정에서 조선족들은 당지의 한족 및 기타 민족과 별다른 충돌이 없이 비교적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또한 농경을 바탕으로 집거지역을 이루어 왔기에 민족의 전통도 고스란히 지켜올 수 있었다. 그리고 신 중국이 건립된 후에도 조선족은 장기간 한반도와 거의 단절된 상태에 처해 있었기에 조선족문제는 단지 중국내의 조선족이라는 차원에서 제기될 뿐이지 복잡한 외교문제로까지 얽히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개방정책의 진일보의 추진과 한중수교, 북한문제의 국제화,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조선족문제도 더는 조선족만의 문제 혹은 중국내의 소수민족문제만이 아닌 국외외교문제와 연관되게 되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환경의 변화로 오래 동안 중국 내 조선족사회에서 금기되었던 민족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고민을 동반하고 있다.
대개 이시기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주로 중국국민으로서의 위치설정에는 별로 이의가 없는 듯 하다. 그러나 향후의 발전향방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리는바, 실용적인 민족주의, 순수민족주의, 민족허무주의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무튼 중국의 민족정책하의 조선족의 금후 발전은 조선족사회에 직면한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Ⅳ. 조선족사회의 현주소
 
민족공동체의 시각에서 볼 때, 과거 중국 56개 민족 중 교육의 으뜸이요, 문화소질이 가장 높은 민족으로서의 영예를 떨치던 조선족공동체는 오늘이 이르러 千瘡百孔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면서 조선족사회를 미증유의 곤혹과 갈등에 빠뜨려 놓고 있다.
 
1. 심각한 인구문제
 
당면 조선족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는 아마도 인구문제일 것이다. 인구문제는 크게 인구유동과 인구의 감소 두 가지 방면으로 볼 수 있다.
중국조선족사회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중국의 경제개혁과 사회변동의 맥락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및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은 중국의 사회주의체제에서의 하나의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획일하게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에 얽매여 있던 침체된 조선족사회에도 중국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일대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동북삼성의 농경민족으로 봉폐된 울타리에서의 삶을 영위하여 오던 조선족들의 활동반경이 일약 전국적 범위 지어는 국외로 넓혀지게 되었으며 폐쇄된 지역에 한정되어 있던 조선족공동체의 구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80년대로부터 시작된 김치, 짠지장사의 행렬을 이어 한국과의 수교 뒤에는 약장사가 한국 내에 진을 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기업의 중국진출로 북경, 발해만 일대의 한국기업 및 유흥업소에 또한 조선족들이 대거 몰리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중반부터 약장사의 행렬이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수만의 조선족들이 집 팔고 땅 팔고 재산 팔아 한국의 3D업종에 몰려들어 2, 3 년으로부터 10년, 지어는 10년도 넘는 지구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 사이에 또 섭외혼의 행렬이 가세하기 시작하였으며 불법체류의 딱지를 벗기 위하여 지어는 위장결혼행렬까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아예 서울의 한 모퉁이에 조선족타운이 일어설 정도로 조선족인구이동의 형식도 다종다양하고 수량도 방대하다. 이렇게 이동된 인구가 대략 산해관 이남에 20만, 한국 내에 20만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민족이동을 살펴보면 첫째, 이동의 범위가 무한하다. 둘째, 이민의 주체가 단순한 농업이민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성격이 겹쳐있으며 이민상대도 다양한바, 특히 부녀자와 젊은 지식인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헌데 여기서 우리가 관과 할 수 없는 것은 젊은 지식인층의 대거 남하는 漢민족문화권을 향한 산발적인 이동이기에 동화의 가능성이 크고, 부녀자들의 이동은 외국으로의 이동, 지어는 국적이동이기에 조선족인구의 성장을 기계적으로 차단한다는 점이다. 아무튼 개혁개방은 조선족사회에 전에 없는 부를 창조하여준 반면에 일련의 심각한 지각변동을 동반하였다. 이러한 변화에서도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조선족의 인구이동은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이동이었으나 이 몇 년간의 조선족의 이동 및 조선족사회의 변화는 단지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지각변동일 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 내에서의 조선족의 위치와 그 뿌리를 흔들 만큼 민족의식의 갈등, 가치관의 변화, 정체성의 혼동 등 근본적인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급물 살을 타는 인구이동도 심각하지만 인구의 감소 역시 조선족사회의 발전에 陰影을 드리우고 있다. 조선족은 원래부터 중국에서 계획생육의 모범으로 정평이 나있다. 경제적인 여건의 한계, 삶의 질에 대한 추구 등등의 원인으로 조선족가정은 오래 전부터 거의 아이 하나만 고집하여 왔다. 워낙 인구 자연성장률이 저조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섭외혼의 증가로 조선족인구성장에는 제동이 걸렸다. 정확한 통계수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선족의 婚育적령기의 여성 20만명 중, 2만에 달하는 여성이 한국에 시집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어 일가에서는 결혼적령기 여성의 ⅓은 한국에 시집갔고 다른 ⅓은 도시의 유흥업소에 몰려 있으며 나머지 ⅓도 도시에 거주한다고 짚고 있다. 국내에서 이동되는 여성들은 그래도 조선족남성과의 결합 및 2세의 생산까지 기대할 수 있지만 몇만에 달하는 조선족여성들의 섭외혼은 결국 조선족인구성장을 아예 기계적으로 차단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양질의 삶을 위하여, 부를 찾아, 자식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이동의 길에 나서거나 섭외혼을 선택하는 그 자체는 조금도 탓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족의 인구이동과 인구감소는 사회 면면에 걸쳐 많은 문제점들과 위기상황을 유발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流民층의 대량증가. 이동의 길에 오른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직장을 버리고 땅을 팔고 집을 팔고 삶의 희망을 유일하게 한국 행에 건 사람으로, 절대다수가 무한정 한국에 머물러 있거나 귀국 후에는 새로운 투자거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는 집 한 채 달랑 장만하는데 까지만 그친다. 손에 목돈을 잡았던 그들의 눈에 힘든 일, 자질구레한 일은 더는 생계의 수단으로 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연길시 택시업은 거의 조선족들이 장악하였지만 지금에 이르러 택시업에 종사하는 기사의 95%는 한족이라고 한다.
또한 한국행을 거친 농민중의 대다수는 안일한 생활환경을 찾아 농촌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지만, 그들 역시 마땅한 생계수단과 능력, 기술이 없기에 결국 일자리가 없이 허송세월하는 유민층에 머물고 만다. 그러다 벌어간 돈을 탕진한 후면 이들은 또다시 거대한 희생을 대가로 한국행에 나선다. 이런 악성순환으로 조선족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할 것 없이 뿌리 없는 부평초, 즉 떠돌이 민족으로 된 셈이다.
둘째. 농촌공동체의 붕괴. 전술하다시피 조선족공동체는 주로 농경생활을 매개로 이루어진 지역공동체이다. 많은 농민들이 소 팔고 땅 팔고 집 팔아 한국에 나가고 귀국 후에는 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기에 전통적인 조선족 촌락공동체는 붕괴의 변연에서 헤매고 있으며 이농현상으로 우리의 조상들이 피땀으로 개간한 토지가 한족들한테로 서서히 넘어가고 있다. 연변의 경우, 두만강연안일대는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집거지였으나 지금은 漢族농호가 적지 않게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또한 섭외혼과 혼인적령기여성들의 대거 이동으로 농촌총각들이 장가들지 못하고 있으며 三無(아이들을 보기가 힘들고 젊은 여성들을 보기가 힘들며 청장년을 보기가 힘든 현상)현상이 심각하다.
 
2. 민족교육의 침체
농촌교육의 피폐는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의 향마다 중학, 촌마다의 소학은 이젠 동화 속의 이야기 마냥 우리한테서 멀리 느껴진다. 20여년의 중국의 개혁개방행정과 더불어 하나 둘 사라지던 농촌학교의 풍경은 점차 도시로 만연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특히 가슴아픈 현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과거 독립운동의 본거지역할을 담당하던 명동학교, 정동학교 등 학교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남아 있는 학교들도 바람 앞의 갈대신세다.
사례1: 용정시 로두구진 동불사향은 조선족들이 집거하여 있는 향으로, 90년대 중기까지만 하여도 전 향에 7개의 소학교에 1100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인구가 급감하면서 2000년에 이르러 동불사중심소학교 하나만 남게 되었고 학생수도 12개학급에 540여명으로 줄었으며 2004년에는 172명으로 줄었다.
인구 3만명의 조양천진에서 2003년 9월, 봉림소학교의 학생모집 수는 8명, 철도소학교의 모집 수는 37명,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유구한 조양소학교의 학생모집 수는 38명, 도합 83명뿐이다.
산재지구의 경우, 오상시 향양진 조선족소학교의 학생총수는 도합 20명, 한 학년에 평균 2.3명뿐이다.
사례2: 동불사향의 경우, 농촌학교의 통합으로 “학생들은 자전거 아니면 버스로 통학하여야 하는데 가장 멀리는 왕복 25㎞의 길을 달려야 한다. 공부하기 위하여 새벽 4시면 일어나야 하고 5시에 밥 먹고 온다 하여도 길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오늘도 몇 시에 올지 모르는 버스를 오후 3시부터 기다리는 애들, 종착역에 내려서는 또다시 더 먼길을 걸어야 할 애들도 있다. 한쪽 거리가 10㎞되는 대마의 18명 학생은 버스가 미처 당도하지 못하는 날이면 학부모들까지 동원하여야 한다. 경운기로 자녀들을 학교까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사례3: “세린하향 연합학교에서는 교원1명이 교수안 6, 7개씩 쓰는 것은 보통현상, 지어 어떤 교원은 10개씩이나 가지고 있다. 새는 작아도 오장육부가 다 있다고 학생 수는 적지만 모든 과정을 다 배워주자니 교원이 모자란다.…과중한 부담을 안고 일하지만 월 노임은 평균 800원밖에 안 된다.…
사례4: 동불사소학교의 경우, “석탄, 전기, 보일러공의 노임, 고장난 부속품값을 지출하자고 보니 있는 자금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올해에는 보일러를 중지하고 난로를 놓았지만 환경오염은 두말할 것 없고 화재위험이 노출되어 대비책에 신경 써야 한다”.
위의 사례들은 결코 어느 한 학교만의 현실인 것이 아니라 전반 농촌학교의 상황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농촌학교들은 학생래원 감소, 학교수 감소, 교사대오, 학교시설, 자금부족 등 여러 가지로 곤경에서 헤매고 있다. 물론 민족교육의 진지를 고수하려고 많은 지성인들의 눈물겨운 몸부림을 하고 있지만 이 같은 노력으로는 당면의 현실을 역전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다.
도시조선족학교의 전망 역시 밝은 것만은 아니다. 인구성장의 부진으로 조선족중소학교의 규모는 날로 축소되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한족학교를 택한다. 2004년의 경우, 연길시의 한족소학교들은 학생모집시 모두 정원초과이지만 7개소의 조선족소학교들은 모두 정원미달이었으며 건공소학교의 경우는 겨우 90여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표2> 연도별 연변지구 조선족중소학교數
(민족연합학교는 포함하지 않았음)
 
學年度
小學校
初級中學校
高級中學校
完全中學
農村
縣鎭
農村
縣鎭
農村
縣鎭
農村
縣鎭
1989-1990년
188
46
234
19
24
43
-
9
9
-
13
13
1995-1996년
77
57
134
6
26
32
-
8
8
-
7
7
1998-1999년
67
54
121
1
24
25
-
8
8
-
7
7
2001-2002년
43
42
85
2
23
25
-
8
8
-
7
7
 
자료: 연변조선족자치주교육위원회편, 연도별 『교육통계자료』에 의하여 작성.
 
學生來源의 감소, 학교수의 감소에 학부모들의 부재로 인한 학생들의 교육환경도 말이 아니다. 연길시 조선족소학교의 학부모상황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부모의 출국이 45.25%, 이혼가정이 10.8%, 부모의 사망이 1.5%, 이상 3가지 사항으로 인한 결손가정이 55.7%이고 부모와 함께 있는 학생이 전체 학생수의 41.1%밖에 안 된다. 자식을 위해 돈벌러 나선다지만 실제로 절반을 넘어서는 학생들이 감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정상적인 가정교육도 받지 못한 채 편부모, 조부모의 슬하거나 친척, 친우의 그늘에, 지어는 기탁학교에 방치되어 있는 현실이다.
이밖에 교육이론과 실천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 이를테면 민족교육이념의 혼선, 교육체계의 경직성, 교육시설의 낙후, 교사대오의 불 온정 등등으로 민족교육의 생존 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3. 전통적인 도덕가치관의 실추
1) 가정윤리도덕의 파괴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예의민족으로 존경받아 왔다. 백의민족이라는 호칭에는 순결과 성결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족사회는 전통적 도덕관념이 무너지면서 과거의 화목하고 단란하던 가정들이 결손가정, 가족해체 등 다양한 형식으로 바뀌고 있다. 연길시 중소학교학생조사에서 55.7%의 학생들이 편부모, 조부모의 슬하거나 기타의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외국에서의 5년, 10년 지어는 10년을 넘어서는 별거생활, 한국 내에서의 임시조합가정의 출현으로 적지 않은 가정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더 엄중한 것은 이른바 위장결혼의 이름 하에 가짜이혼이 결국에는 진짜이혼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선진적인 문명과 현대화한 삶을 경험한 출국자들이 이른바 가치관념의 차이로 이혼으로 다가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내를 얻기도 힘들지만 아내를 지키기는 더 힘들다”는 유행어에서 우리는 조선족사회 가족생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2) 미래지향성 결여
근면과 인내 역시 조선민족의 특징적인 기질이다. 그 어떤 역경이거나 환경에서도 조선족은 민족특유의 근면과 인내 및 총명과 재질로 삶의 터전을 구축하여 왔다. 헌데 오늘날 조선족은 지나치게 일변도로 한국에 의지하여 있으며 그 뒷면에는 일확천금의 한탕주의가 사상이 만연되어 있다. 한국은 고국이라는 차원을 떠나서 목돈을 쥘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요, ‘구세주’였다. 한국의 문호가 열리면서부터 온당한 경제적 기반확보보다는 천방백계로, 지어는 범법도 마다하지 않고 출국의 길에 나선다. 또한 귀국 후에는 애면글면 벌어온 돈으로 내실을 탄탄히 굳힐 대신 투자할 데가 마땅치 않다는 것을 빙자하여 정작 중요한 건 갖바치 내일 모레 식으로 미루기만 하고 국외에서 보냈던 힘든 세월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노래방, 사우나, 안마원을 전전하면서 무절제한 허영과 향락에 빠진다. 따라서 도시에는 새로운 유민층이 생기고 농촌에는 이른바 3괴현상(즉 청년들의 문구장 점령, 청년들의 노인활동실 점령, 농망기의 遊漢)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다가 벌어온 돈을 탕진한 후에는 또다시 한국행에 나선다. 연변의 조선족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연변재정수입의 2배에 해당하지만 이 거액의 돈이 재생산에 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집장만과 화려한 집장식에 흘러들고 나머지는 은행이거나 사채업, 과소비에 들어간다.
 
4. 민족정체성의 동요
 
9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중국의 조선족사회는 비록 가난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지역, 출신, 신분 등에 인한 불신과 갈등 같은 것이 없이 하나의 공동체로 뭉쳐있었으며 중국에서의 자신의 입지에 대하여 그 어떤 의구심이나 회의, 동요가 없이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서의 당당한 위치를 고집하였다. 아무리 장기적으로 해외에 체류하여도 그것은 단지 생계수단의 차원이었을 뿐, 그래도 어디까지나 중국을 삶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중국의 국민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같은 인식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조선족사회의 지각변동뿐만 아니라 그 뿌리까지 흔들기에 이르고 있다.
우선 조선족공동체는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단일한 집단으로부터 다양한 군체로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흔히 현재를 세계화라고 말하지만 조선족만큼 ‘세계화’정도가 높은 집단도 드물 것이다. 거주지와 경제적 활동무대의 확장은 조선족이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다양한 문화배경에서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와 같은 생활세계의 확장과 다원화는 결과적으로 조선족을 단일한 집단으로부터 다양한 군체로 나뉘게 하였다.
다음 생활권의 확대, 부동한 군체의 출현으로 집단의 미래에 관계되는 사안에 대한 인식도 갈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족공동체에 대한 인식에서 우리 사회에는 점차 민족허무주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혹은 감상적인 민족주의)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자는 조선족사회와 중국의 주류사회와의 괴리현상을 지적하면서 과거의 봉폐적인 민족공동체의 성찰로부터 중국주류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을 권장하며 지어는 민족언어, 문자의 중요성까지 일축하여 조선어무용론을 거론하기에까지 이른다. 그 전형적인 실례가 바로 조선족학교가 조선족학부모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밖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조선족들은 충분히 자기 민족의 언어, 문자를 사용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출신의 행정당직자들은 그것을 일종의 번거로움으로 간주하고 솔선하여 한어를 사용한다. 후자는 재래의 중국국민으로서의 입지에 회의를 느끼며 한국과의 관계설정에서 조선족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갑자기 나타난 한국을 구세주로, 지어는 국적회복까지 운운하고 있다. 2003년, 한국의 체류자중 5천에 넘는 조선족들이 한국정부를 향한 단식농성에 가담하여 고국에 살 권리를 주장하고 한 세기동안 우리의 조상들이 중국에서 쌓은 정치, 경제 및 문화적 입지를 서슴없이 팽개치기에 이른다.
또한 굳이 양극에 속하지 않지만 조선족으로서의 과거의 긍지와 자부심은 사라지고 새삼스레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나가야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층도 적지 않다.
 
Ⅴ. 조선족사회의 발전전망
 
격변의 전환기와 더불어 조선족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수면에 노출되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나름대로의 고민과 진로모색에 나서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청사진을 구상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좌표설정이 정확하여야 한다. 중국의 조선족, 그들은 과거에도 중국의 조선족이고 지금도 중국의 조선족이며 장래에도 중국의 조선족이다. 중국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 하면서 중국 다민족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조선족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상이다. 이 같은 청사진을 실현함에 있어서 목하 조선족사회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방면에 초점을 맞추어 당면의 위기를 타개하여야 한다.
 
1. 農工商 일체화의 새로운 집거구의 형성
조선족사회의 이동인구 절대부분은 돈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허나 이 같은 돈버는 작업이 그 어떤 산업을 기반으로 한 온당하면서도 장구한 직업이 아니라 주로 한국이거나 중국 대도시에서의 3D업종, 즉 떠돌이 작업이다. 민족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아무래도 경제력이다. 경제실력의 신장이야말로 오늘날 조선족사회에 대두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는 핵심적 고리이다. 오늘날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토대로 한 민족공동체의 해체가 불가피적이라면 새로운 시장경제토대 위의 새로운 조합도 역시 불가피적인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새로운 조합에는 반드시 튼실한 경제실력이 받침 되어야 함은 더 말할 것 없다.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조합으로 조선족 집충촌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러한 집중촌건설의 특징은 바로 과거의 단일한 경제구조에서 탈피하여 농공상 일체화의 활성화한 산업구조와 개방된 경영체제 및 고도의 시장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조선족집중촌건설은 조선족사회의 해체를 막고 국내외에서 떠돌고 있는 조선족들을 품을 수 있는 물질적, 사회적 기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조선족사회에는 이미 새로운 집중촌의 형식으로 도시형집거타운, 도시근교형모델, 농촌중심촌모델 등 다양한 모델들이 떠오르고 있다. 도시집거타운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심양시 서탑이 꼽히고 있는데, 서탑은 대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조선족이 상대적으로 집거한 유리한 조건을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政府적인 행위로 개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업체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조선족과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상권을 이루고 있다.
도시근교형모델은 도시에 가까운 지리적 여건을 활용하여 도시인접지 땅을 폐경하여 2, 3차 산업기지로 전환하고 다시 그곳을 공업단지, 아파트단지, 문화오락구역으로 나누고 촌민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하게 한 후 재분배하는 형식으로, 여기에는 흑룡강성 해림시 신합촌과 심양의 만융촌, 연맹촌이 그 전형이다. 만융촌의 경우, 5년전부터 역경을 이겨내며 동북삼성내에서 이사호를 받아들여 원래의 700-800호로부터 1600호로 증가되었다. 연맹촌의 경우 화원신촌이라는 아파트단지를 구성하고 공업단지를 건설하였으며 의료보험제도까지 실시하여 주민들에게 각종 생활대우를 보장하는 등 활성화한 도경으로 산재되어 있는 조선족농호들을 집합시키고 있다.
농촌중심촌모델은 도시외곽에 있지만 영농조건이 좋고 경제기반도 좋으며 일정한 문화적기반(조선족학교)도 있는 촌을 중심으로 주변의 散在농호들을 집중하는 형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촌은 한때 중국에서 유명한 시범촌이었던 길림시 아라디촌이다.
상기의 집중촌건설외에도 우리는 전통적인 집거구역에 대한 재정비, 재조합을 거쳐 조선족민족공동체존속의 공간적 기반을 넓혀야 한다. 중국의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충분히 활용하여 조선족의 최대의 집거지인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산업구조조정, 농촌토지의 규모화와 시장화, 특종업개발, 문화관광산업의 개발 등 여러 가지 도경으로 기존의 조선족집거구 토대를 개변하여 시장경제발전에 부응하는 새로운 집거지역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2. 문화공동체의 의미부각과 네트워크구축
문화의 세기를 맞이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문화의 중요성은 문화산업형태로서의 고부가가치창출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족공동체를 결속하는 가장 큰 응집력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화는 한 사회나 사회집단을 특징 지워주는 고유의 정신적 물질적 지적 정서적 복합체로, 막대한 통합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역, 계급, 시대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 중국화교들의 단결력은 조직체에 비견할 만큼 치밀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 같은 결속력의 바탕에는 바로 수 천년을 내려오면서 쌓인 중화주의를 핵으로 하는 문화의 힘이 깔려 있다. 중국의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척에 따라 과거의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지역공동체는 날로 해체에 직면하게 되고 또 우리가 조선족공동체결속의 대안으로 제기하는 집중촌건설 역시 한계성을 띠고 있다. 해외 중국화교들이 강력한 민족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 바로 중화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우월한 문화의식인 것처럼 우리가 신분, 직업, 주거의 장벽을 넘고 날로 심각해지는 散居상태에서 조선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이 바로 문화의 저력이다. 민족교육, 다양한 문화행사, 각종 민간․사회단체의 결성, 문화센터의 설립,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한민족과의 활발한 교류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민족문화와 민족의식을 고양하여야 할뿐만 아니라 시장체제에 발 맞추어 우리 민족문화의 유산을 충분히 발굴하여 거기에 지역적 민족적 특성을 가미하여 우리의 문화로 하여금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으로 부상케 하여야 한다.
또한 오늘날 조선족의 전통적인 집거지가 날로 줄어들고 조선족사회의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척됨에 따라 지역적 공간적 시간적 및 신분적 이념적 차이를 벗어나 정보화 수단으로 문화적인 통합과 협력을 꾀할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민족네트워크구축이 떠오르고 있다. 문화공동체의미부각과 네트워크구축의 당위성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기된다.
첫째, 문화공동체 및 한민족네트워크의 구축은 조선족의 과거의 고립된 문화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문화적인 영역을 넓힘과 동시에 보편적 세계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전국 각지에의 산재의 추세가 날로 증가되는 오늘날, 인터넷을 중심으로 디지털 전자정보 기기를 활용하여 부동한 지역, 부동한 출신, 부동한 경제활동의 한계를 넘어 의사소통이 가능한 공간에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조선족을 하나의 문화적인 집합체로 형성할 뿐만 아니라 세계한민족공동체와의 유대도 긴밀히 유지할 수 있는 도경이 바로 문화와 한민족네트워크이다.
둘째, 세계한민족의 문화공통성을 유대로, 한민족 네트워크구축이 가시화 되고 있다. 즉 혈통과 문화적 공통성을 기초로, 세계 여러 지역의 거주하는 한민족구성원들간의 하나의 단일한 커뮤니케이션공간을 통하여 공동의 유대와 귀속감을 발전시키고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증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민족구성원들의 생존발전을 도모하는 움직임이 이미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일고 있다. 때문에 중국의 조선족들도 이 같은 추세에 발 맞춰 경제적, 문화적 활동의 영역을 최대한 확대하여야 한다.
셋째, 민족발전의 차원에서 볼 때, 탈냉전 후 세계는 정치이데올로기보다 문화의 경제논리에 의해서 국제관계를 개편하고 있으며 과학기술과 문화의 힘을 활용한 경쟁력이 국제사회에 있어서 자체민족의 위상을 제고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조선족의 입지구축도 문화의 힘을 떠날 수 없으며 이 같은 조선족의 문화공동체의 결속은 발전적 차원에서 볼 때, 세계 속의 한민족공동체와의 연대를 떠나 운운할 수 없다.
그러나 문화공동체구축, 한민족네트워크구축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지향점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민족네트워크구축은 범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한국, 북한 및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냉전구도로 인하여 사실상 같은 민족이면서도 우리는 국가적으로는 북한, 남한으로 갈라져 있고 민족적으로는 남한의 한민족, 조선의 조선민족, 러시아의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미주의 한인 등 복잡한 양상으로 갈라져 있으며 탈냉전체제 후에도 이 같은 이념적인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같은 고국의 입장이면서도 한국이 중국조선족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재미, 재일 혹은 재러동포와 엄연히 달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해외한인의 입장이면서도 부동한 지역의 동포들의 고국에 대한 태도는 뚜렷이 다르다. 때문에 네트워크구축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은 우선 민족적 화합, 다음은 민족의 발전 즉 민족의 화합과 발전이라고 생각된다. 세계 한민족 모두가 부동한 지역 부동한 거주국의 동일민족과의 동질성 및 이질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전제에서 최대한 서로간의 지역적으로, 이념적으로 존재하던 갈등, 이질성 및 배타의식을 극복하고 민족적인 차원에서의 포용력을 키워야 하며 최대한으로 민족의 발전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리고 한민족네트워크구축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극단적인, 혹은 감상적인 민족주의의 고취이다. 반드시 주변국, 주변민족과의 공생의 원리에 따라 부동한 지역 부동한 거주국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 중국의 조선족은 헌법상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또한 그들의 생존환경도 중국인만큼 민족문화공동체를 지향한다하여 중국의 주체민족 혹은 주류사회와 배치된 편협 적인 방향으로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
 
3.민족교육의 강화와 민족자질의 제고
중국의 조선족은 유태인과 같이 유태교라는 선민의식으로 뭉쳐진 종교도 없고 또한 중국의 한족처럼 민족을 하나로 묶는 중화주의라는 강력한 민족의식도 없다. 우리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땅에 괭이를 박으면서 처음으로 서두른 것도 후대의 교육이었고 일제치하 갖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후대교육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육의 힘이 결국 오늘날 중국에서의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을 창출하였다.
교육을 잃으면 민족을 잃는다. 비록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 여러 가지로 위기와 도전에 직면하고 있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는 옛 전통을 살려 전 사회적으로 민족교육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오늘날의 조선족교육은 단순한 자녀교육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민족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차원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야 한다. 물론 오늘날의 민족교육은 과거의 교육과는 질적으로 내용적으로 달라야 한다.
첫째, 민족교육의 좌표설정에서의 상생과 공생의 원칙: 부동한 문명의 병존은 무엇보다도 각 민족의 부동한 문화적 특색과 개성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 민족교육의 좌표로서 민족과 민족문화의 특수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논리적 근거와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세계화, 보편화 혹은 공생의 원칙을 지향한다하여 일변도로 중국식교육, 중국어중심교육에만 역점을 둔다면 우리의 교육은 민족공동체로서의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된 삶의 궤적에서 탈선하여 중국의 주류문화에 흔적 없이 감겨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민족교육의 당위성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하고 과거의 도식적인 민족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학교교육과정을 통하여 후대들에게 민족문화를 전수하고 민족의식과 민족적 사명감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민족교육강조는 결코 공생의 원리를 떠나 극단적이고 교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
조선족의 교육은 어디까지나 중국경내에서의 민족교육이고 조선족의 생활공간이 21세기 세계의 경제를 주도할 만큼 거대한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는 중국이기에 중국이라는 이 광활한 시장에서 조선족의 입지를 굳히려면 자기민족문화뿐만 아니라 주체민족의 언어와 문화에도 능숙한, 중국의 주류사회에서 여타 민족과 공생할 수 있는 이중문화인양성을 지향하여야 한다.
둘째, 교육체계를 조정하고 민족소질을 제고하여야 한다. 2002년 중국사회과학원의 「당대중국사회계층연구보고」에서는 중국은 이미 현대사회 계층결구를 기본적으로 확립하였다고 지적하였으며 또한 중국의 사회를 10대 계층, 즉 국가와 사회관리계층, 경리계층, 산업노동자계층, 농업노동자계층, 사영기업주계층, 전문기술인원계층, 사무인원계층, 개체공상호계층, 사회봉사인원계층과 도시무직업, 실업과 반실업계층으로 나누었다.
조선족의 교육은 중국에서도 으뜸이라 한다. 그러나 학력만 높고 능력이 낮은 폐단이 존재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중 산업인력의 결여가 우리교육의 가장 큰 허점이다. 상기의 중국사회 10대 계층에서 조선족이 가장 집중된 계층은 아마도 도시 무직업자, 실업자 반실업자계층과 농업노동자계층일 것이다. 지금 조선족사회는 빠른 속도로 도시화에 접근하고 있다. 2002년 9월 기준으로 연변 도시화율은 55.6%, 길림성의 도시화율은 49.68%, 전국도시화율은 26.5%이다. 그러나 이 같은 연변의 빠른 도시화는 주로 주거와 생활양식의 도시화에 그칠 뿐, 사람들의 도시시민으로서의 소질은 빠른 도시화속도와 정비례하지 못한다. 대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초중, 고중학력 소지자들이 국내나 국외에서 종사할 수 있는 업종은 고작 3D업종뿐이고 기타 분야에서는 寸步難行이기에 진정으로 시장경제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단순한 학교교육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회적으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새로운 시장경제체제에 부응하는 활성화한 민족교육체계를 세워 민족소질향상을 꾀하여야 한다. 당면 조선족사회에서도 이 같은 교육의 절박성을 실감한 유지인사들이 조선족벤처산업대학 및 기타의 기술학교설립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이 같은 착상은 민족자질제고에서의 참신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셋째,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당면 우리 교육의 급선무는 생존의 위기를 타개하는 것이다. 인구의 감소로 조선족학교의 학생래원이 고갈되어 가고 있는 마당에 조선족학생들의 한족학교에로의 유입은 조선족학교의 생존에 설상가상의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민족교육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다. 즉 현대적인 교육이념, 선진적인 교육시설, 질 높은 교사대오의 유치 등으로 곤경에서 허덕이고 있는 민족교육을 부추 켜야 한다. 이 같은 경쟁력의 확보에는 물론 조선족사회의 전체적인 관심과 지원이 요청된다.
 
4. 거주국내 권력신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한국정부의 신중한 재외동포정책
중국조선족은 고국을 갖고 있는 민족으로, 조선족의 발전은 고국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또한 고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해외동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조선족 역시 한국의 중요한 자산이요, 울타리이다. 한마디로 조선족과 한민족 및 고국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고국정부의 조선족에 대한 정책도 조선족사회의 발전, 및 민족정체성확립에서의 거대한 변수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재중동포정책은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지만 필자의 소견에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방면에 유의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첫째, 한국정부의 재중동포에 대한 의식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조선족사회의 발전과 한국사회는 불가분리의 관계이지만 실제로 양자사이에는 아직까지 불신과 갈등의 골이 패어 있으며 서로간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놓여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도 인식문제로, 한국은 아직까지도 남북한에 고착된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즉 이념적 갈등의 흔적이다. 같은 재외동포임에도 한국의 재중동포, 재일동포, 재미동포, 재러동포에 대한 시각과 정책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공산권의 나라라는 점, 반세기 남짓한 동안 북한과의 관계만 유지되었다는 점, 경제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 및 한국(조선)의 국적을 포기하고 중국국적에 가입했다는 점 등등의 요인들로 인하여 고국에 비친 중국동포의 상은 결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의 재외동포지원에서 조선족은 늘 소외의 대상이었다. 교육의 경우, 한국의 재외동포교육기관은 미국에 1000곳, 일본에 150곳, 기타지역에 800여 곳 등 도합 2000여 곳에 12만 명을 포용하고 있지만 중국조선족의 교육은 한국의 재외한민족교육지원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다. 또한 경제활동의 경우, 한국정부나 한국기업은 경제적인 이익측면에서 산동이나 요녕의 연해지역, 혹은 북경, 천진, 상해 광주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대거 진출하고 있으나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집거지역은 한국기업체들의 경제활동영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단지 동포들의 생활지역으로, 백두산관광의 중간역으로 머물러 있다. 즉 정부차원에서나 민간차원에서나 조선족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협력이나 지원책은 거의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혹자는 중국의 사회주의라는 체제 때문에 한국정부의 재외교포정책은 부득불 중국동포를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은 정작 중국의 체제 때문에 건드리지 말아야 할 국적문제, 간도문제, 고구려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억지로 조선족을 끌어들여 조선족의 입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둘째, 한국의 재중동포정책은 무엇보다도 조선족들의 중국내의 권력신장을 중심으로 하여야 한다.
중국조선족은 무엇보다도 먼저 중국의 국민이기에 한국의 재외동포정책은 조선족의 이 같은 입지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와 파악이 있어야 한다. 국적회복문제는 결코 재중동포문제의 근본이 아니다. 산업연수인력의 확대라든가 체류기간의 연장 역시 단기적인 시책일 뿐이다. 당면 조선족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재중동포정책은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족사회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투자를 통해 조선족의 경제적 실력을 키우는데 주력하여야 한다. 특히 연변 특유의 지정학적 조건을 감안하여 중국정부와의 협력을 통하여 연변지역의 경제발전을 추진함으로써 조선족공동체의 내실을 굳혀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 또한 한국이 지향하고 있는 동북아중심국 구축 및 중국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다. 실제로 이미 한국의 일부 민간단체들, 이를테면 두레마을 등 단체들에서는 조선족사회의 경제발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변 등지에 대규모 생태농업단지를 구축하여 생태중심의 선진적인 농법으로 고부가가치의 농산품을 생산하여 당지 농민들에게 실제적인 혜택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살아가는 방법과 길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으로 한국의 재중동포정책은 조선족의 민족교육부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조선족교육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가 주변민족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교육의 질적 제고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선진적인 교육이념, 교육시설 및 질 높은 교사대오가 안 받침 되어야 한다. 허나 당면 조선족사회의 현실적 여건으로 이러한 경쟁력을 확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경제적, 기술적, 인적 지원이 절실히 요청되는 고비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재중동포정책은 소수의 권력신장이나 이익을 챙겨주는 근시안적 안광보다 조선족의 중국 내 권익과 역량신장, 및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고양, 조선족과 한국과의 호혜적 발전 등 장구 적인 발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울타리를 넓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진정한 중국조선족의 발전적 출로와 비전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움직인다면 조선족사회의 고국간의 괴리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동포사회내의 분열과 갈등을 조성할 수 있으며 조선족들이 한 세기동안 쌓아왔던 중국에서의 정치 경제적, 사회 문화적 입지를 산산이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며 지어는 나라지간의 외교적 마찰을 초래할 수도 있다.
 
Ⅵ. 맺는 말
 
본 세기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가․아널드 토인비는 그의 유명한 『역사의 연구』라는 저서에서 이른바 ‘도전과 응전’의 역사철학의 중요한 명제를 내놓았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모든 성공적인 문명은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으로부터의 ‘전’에 대한 ‘응전’에 성공한 문명집단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사회는 준엄한 도전에 직면하여 있다. 인구위기, 교육위기, 가치관의 혼동, 정체성의 동요 등 사회면면을 거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면서 과거의 하나로 뭉쳐졌던 조선족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시하여야 할 점은 조선족사회는 결코 해체의 원심력만 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집의 구심력도 있다는 점이다. 즉 원심력과 구심력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존재로, 도전에는 새로운 비약의 기회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해체의 원심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미치지만 결집의 구심력의 작용을 위해서는 절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제 중국의 조선족사회도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으로서 어떻게 격변의 전환기에 나타나는 일련의 사회문제를 풀어가면서 민족의 힘을 결집하겠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는 한 세기 남짓한 동안 중국의 굴곡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피와 땀으로 이 땅을 개척하고 이 땅을 지켜내 당당한 중국의 일원으로 자리를 굳혀온 역사적 토대가 있고 또한 중국의 여느 민족에 비하여 짧은 역사의 이주민족이면서 중국이라는 56개 복합민족의 거대한 국가에서 우수한 문화민족으로 부상할 수 있게된 민족의 슬기와 총명과 저력이 있다. 또한 부동한 시기 정치풍운의 변화와 갈림길에서의 방황과 선택, 시련과 성공의 경험도 무수히 쌓아왔다. 다만 우리가 중국조선족으로의 입지를 굳건히 지키면서 중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민족주체성을 정립하면서 능동적으로 주변위기와 도전에 응전해 나선다면 21세기의 조선족은 또다시 새로운 차원에서의 중국의 문화민족으로 새롭게 거듭 날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싶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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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일, 허명철 주필,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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